[외신 번역/자체 번역] 에너지의 역사: 발전(發電) 산업의 역사 1부
원문 기사: https://www.powermag.com/history-of-power-the-evolution-of-the-electric-generation-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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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잡지는 1882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무렵 세계는 새로우면서도 다재다능한 형태의 에너지인 전기의 의미를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죠. 140년의 시간 동안, 우리 잡지의 페이지들은 세계의 전력 부문을 특징짓는 기술과 시장의 빠르게 변화하는 진화들로 채워졌습니다. 아래에서 서술한 내용들은 '권력'의 역사와 '동력'의 역사를 형성한 사건들 중 극히 일부입니다.
에너지의 역사는 실로 길고도 복잡하며, 수백 명이 이바지한 많은 개념과 기술이 에너지 역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역사는 영국에서 스테판 그레이가 진행한 전기전도 실험에서부터 많은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이 전기전도 실험은 이후 1740년 독일 레이덴에서 유리 마찰 발전기가 발명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 발명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명한 실험에 영향을 끼쳤고, 1800년 이탈리아에서 알레산드로 볼타의 최초 배터리 발명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험프리 데이비의 "아크등"이 1808년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도, 1820년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가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증명 때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영감을 불어넣었죠. 그리고 1820년, 현대의 에너지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마이클 패러데이와 조셉 헨리의 원시적인 전기 모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1831년에는 자석 근처로 이동하는 전선에서 전류가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로 발전기의 원리가 밝혀집니다.
최초의 기본적인 발전기의 발명은 1832년 프랑스인인 히폴리트 픽시가 해낸 것으로 인정됩니다. 안토니오 파치노티는 1860년까지 히폴리트의 발전기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직류(DC) 전력을 제공했습니다. 1876년에 베르너 폰 지멘스, 찰스 휘스톤, S.A. 발리는 거의 동시에 "자기여기다나이모(self-exciting dynamo)-전기 발전기"를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1870년 벨기에 발명가인 제노베 그람이 모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에 적합한 직류 전원을 생성하는 발전기를 만들어냈을 때, 그것이 이제껏 모든 개선안 중에서 가작 독보적이었다는 사실은 쉬이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죠.
1877년에 이르러 전 세계 많은 도시의 밤거리가 아크등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그러나 아크등은 당시에 너무 심하게 밝았기에 일반적인 방에서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오하이오를 거점으로 둔 찰스 F. 브러시는 안정적인 발전기 디자인을 개발하여 이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점까지도 많은 진보적 사상가들이 대규모 전력 분배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토마스 에디슨은 1879년에 아크등보다는 덜 밝고 눈도 덜 시린 백열등을 발명했고, POWER 잡지가 창간되기 불과 한 달 전인 1882년 9월에 로어맨해튼의에 "펄 스트리트"(그림 1)라는 중앙 발전소를 설립했습니다.

석탄에 뿌리를 둔 역사
교류(AC)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젖혔습니다(이에 대한 것은 "테슬라와 전류 전쟁" 부분을 참고하세요). 이 새로운 영역에는 수력 발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189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오리건 주, 콜로라도 주, 크로아티아(1895년에 완전한 다상계 교류가 최초로 시연된 곳), 나이아가라 폭포 및 일본에서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테슬라와 전류 전쟁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테슬라를 자동차로 더 잘 알지만, 이 이름 뒤에 숨겨진 진짜 천재는 일론 머스크가 아닌 세르비아계 미국인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인 니콜라 테슬라입니다. 테슬라는 모든 의도와 목적을 위해 오늘날의 현대 교류(AC) 전력 공급 시스템을 개척한 사람이었습니다. 테슬라는 1856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 스밀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공과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현재의 체코에 있는 프라하 대학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1882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콘티넨탈 에디슨 회사에서 직류(DC) 발전소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2년 후 그는 미국으로 완전하게 이주, 1889년에 귀화하게 이릅니다.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뉴욕에서 토마스 에디슨의 회사에서 직업을 구해 1년 간 근무했습니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기술과 직업 윤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두 사람은 기질과 방법론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테슬라는 마치 신이라도 내린 듯한 예지력을 과시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에디슨은 실제 실험과 시행착오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죠. 또한 테슬라는 교류 전기 시스템이 대규모 전력 공급에 더 실용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반면 에디슨은 직류 시스템을 옹호하였는데, 이는 "전류 전쟁"으로 알려진 두 명의 사업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건들로 이어집니다. 테슬라가 개선한 발전기의 지불 문제 탓에 에디슨의 회사를 퇴사하게 됩니다. 퇴사 후 테슬라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고군분투했습니다. 마침내 자금이 마련되어 회사를 운영하게 되었을 때, 테슬라는 시장의 흐름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였으며 약 2년 동안 교류 발전기, 변압기와 모터의 전체 다상계를 포함하는 30개의 발명품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테슬라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며 미국 전기 엔지니어 협회(American institute of Eletrical Enginerrs)에 초대되어 연설을 하기에 이릅니다. 테슬라가 또 다른 교류 전력의 선구자인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눈길을 사로잡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웨싱턴하우스는 테슬라의 특허권을 전격 인수하고, 이를 통해 교류 시스템은 더 큰 추진력을 얻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아마 전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전투는 1893년의 일로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당시의 명칭은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였음) 기간에 일어난 전투일 겁니다. 웨스팅하우스의 회사는 전기로 박람회에 전력을 공급하는 권한을 에디슨과의 치열한 입찰 승부에서 따냈는데요. 테슬라의 다상계가 박람회에 충분한 전기를 공급하였다지요. 전시회에 전시된 전시품(그림 2) 중에는 배전반, 다상계 발전기, 승압 변압기, 송전선로, 강압 변압기, 산업용 크기의 유도 전동기, 동기 전동기, 회전식 직류 변환기 계량기, 기타 보조 장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 시연을 통해 대중은 교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두루 배워갔죠. 전력이 장거리로 전송될 수 있고 심지어 DC 시스템을 공급하는 데까지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를 통해 교류 시스템의 인기는 날개 돋친듯 솟아오릅니다. ![]() 2. 혁신으로 가득찬 전시회. 웨스팅하우스 전기 회사는 1893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 니콜라 테슬라의 특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전기 모터의 전시와 작동 방식을 시연하였습니다. 전시(앞, 중앙)에는 초기 테슬라의 코일과 고주파 교류 발전기의 부품이 보입니다. 사진 제공: Detre Library & Archives, Heinz 역사 센터 전기 발명 외에도 테슬라는 X선을 실험하고 단거리 무선 통신을 시연했는데, 특히 무선 조종 보트를 직접 제작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테슬라는 당대에 꽤 유명인사였고 존경도 받았지만, 그의 발명품으로 장기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1943년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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